원지동 419-7번지에는 마을의 길흉화복을 기원하며 산제를 지냈던 도당터가 있다.
현재는 산제를 지내고 있지 않지만 30년 전만 하더라도 2∼3일간 무당을 불러 제사를 지냈으며, 산제의 비용은 동민의 추렴으로 충당하였다. 현재 이곳은 어린이 놀이터가 설치 되어 있다.
원지동에서 청계산 등산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굴다리 입구 오른편에는 15.2㎡ 정도의 미륵당(원지동 362-4,5번지)이 세워져 있다.
이 안에는 목탁과 제기가 갖추어져 있고 크기가 2m정도 되는 백 색 입상인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3호 인 이 미륵불은 원터마을의 수호신으로 1년에 한번씩 주민들이 동제를 지내고 있다.
원래 이 미륵불은 아주 신비한 영험이 있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차를 동원하여 이 미륵불을 일본에 반출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미륵불의 영험을 믿고 계속 몰려들자 일본인들은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내었는데, 그 후 부터 미륵불은 영험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전한다.
우면동 48에는 바우뫼로11길 50(우면동)에서 이전된, 경주 이씨 석탄(石灘)선생의 11대손인 당령공에게 그 생전에 영조가 친히 내린 효자문(홍살문)이 있다.
당령공은 6세때 일가집 잔치에 가서 어머니께 갖다 드리려고 과일을 옷 속에 간수하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그의 효심에 감탄하였고, 27세때 에는 부친이 발에 쑥뜸을 뜨게 되자 부친의 아픔을 모른체 할 수 없 어 자기 발등에도 똑같이 뜸을 뜨게 하였다. 또 37세 때에는 모친이 열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모친의 변을 맛보아 병세를 판단하는 등 세인은 흉내도 내지 못할 효행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신동아아파트 자리에 홍문앞자리라고 불리는 들이 있었는데, 여기에 조선중기의 명신 충숙공 유관(柳灌: 1484년-1545년)의 4정문이 있다.
이는 충ㆍ효ㆍ열녀ㆍ충비의 정문으로 충신은 본인, 효자는 유관의 아들 유광찬, 열녀는 유광찬의 부인 신씨, 충비는 유관의 여종 갑이 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이었다. 유관은 중종때 이조판서ㆍ평 안도관찰사를 거쳐 인조 때 우의정ㆍ좌의정이 되었다가 명종이 즉위 하면서 윤원형ㆍ이기 등 소윤(小尹)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ㆍ유인숙 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절도유배형에 처해져 서천으로 귀양갔지만 온양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에 아들 광찬이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오다 천안서 죽자 그 부인 신씨는 이들 두 시체를 천신만고 끝에 천안에서 한양으로 모시고 와 장사지 냈다. 또한 여종 갑이는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유관을 무고했던 우의정 정순붕 집안의 노비로 들어가 전염병을 퍼뜨려 원수의 가족 들을 몰살시켰다. 즉 갑이는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의 뼈를 구해다가 정순붕의 베개 속에 넣어 병을 전염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영조 때 세워진 4정문은 1973년 경기도 안산시 와리로 이전되 었다.
무궁전연립주택 앞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높이 19m로서 수령이 300년 정도 되었다.
과거 사평로 동쪽 서래마을 주민들의 추천으로 마을의 평온과 안정을 빌 동제를 올리던 곳으로 지금은 지역주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1972년에 서초구 보호수로 지정, 관리되고 있 는 이 나무는 지역주민 정서함양뿐만 아니라 주민단합의 교훈을 전 하는 곳이기도 하다.(반포동 535-21)
언구비(彦九碑)는 지금의 영동시장 네거리에 반포동과 논현동에 걸 치 비석 9개가 있어 유래 된 이름이다. 조선조 순조 11년 세도정치 로 크게 나라가 혼란해지자 도둑이 창궐하여 민가 의 피해가 극심하 였다. 이때 의협심이 강한 무명의 아홉 선비가 주동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도둑을 물리치고 민가를 보호했다. 주민들은 이 공을 후세에 남기가 위해 이 비를 세웠는데, 이처럼 그 넋을 전해온 덕분에 오늘 날 반포동이 풍요롭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비석은 일제 말기 에 소실됐다.
반포동 서쪽 끝 동작대교가 놓여있는 곳 부근은 동재기나루터, 즉 동작진(銅雀津)이 있었다.
이 동재기나루터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 천ㆍ수원ㆍ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거나 서울 로 들어오던 사람 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이수천(梨水川) 입구에 해 당하는 동작진은 예전에는 수심이 깊어 나루위에 모노 리탄(毛老里 灘)과 기도(碁島)가 있었다. 이곳은 인근 노량진 관할하에 있었는데, 호남ㆍ호서 지방의 과객(科客)과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나 사선(私船) 몇 척만이 운용되어 교통이 불편하였다.
즉 한강의 각 나루도 규모와 위치에 따라 구분되었는데, 한강진ㆍ노량진ㆍ양화진은 가장 중요한 나루로서 관에서 관리하는 관진(官津)인 반면, 뚝섬이나 광나루ㆍ동작진 등은 민간에서 나룻배를 운영하는 사진(私 津)이었다.
이들 나루 중 가장 험한 곳은 동작진이었으며, <조선 왕 조실록> 에는 동작진에서 나루를 건너다가 배가 침몰하여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많다.
영조 4년(1728년) 소현세자의 적파 손(嫡波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며 발생한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이 파견되었으며, 영조 22년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배급받게 됨으로써 나루터로 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를 만들어 인릉을 찾기도 하였으며, 금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편 도성에서 과천에 이르는 길목으로서의 동작진은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춘향을 찾아 갈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역졸을 거느리고 가만히 숭례문을 내달아 칠 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을 지나고 동작강 얼른 건너 남태령 뛰어 넘어 과천에 이르르니..." (반포동 2-1번지)
서초동 산 140번지 일대에 백제불교초전법륜성지(百濟佛敎初傳法輪 聖地) 전통 사찰 우면상 대성사는 예술의 전당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 제15대 침류대왕 원년인 384년도에 서역 인도승인 마라난타 대사가 동토 중국 동진(東晋)을 거쳐 해동백제의 서울인 남한강변 한주(漢州)에 오니
침류대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맞이하여 궁중에 지내게 하면서 설법을 들었다.
그런데 마라난타(摩羅難陀) 대사는 서역 인도와 동토 중국 동진을 거쳐 해동 백제로 오는 동안 음식과 기후가 맞지 않아 수토병(水土病)으로 고생하였는데,
우면산 생수를 들고 수토병이 나았다. 그리하여 궁중에서 자리를 옮겨 우면 산에 대성초당(大聖草堂)을 창건함으로써 이곳 우면산 대성사는 백제불교초전법륜성지가 되었고,
마라난타대사는 백제불교초전법륜 성사가 되었다. 또 통일신라시대에 원효대사, 의상대사, 현욱선사, 심희 선사 등과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
태고왕사 보우 등과 조선시대 무학대사, 보우대사 허응, 환성 지안 대사 등이 이 절에 머물렀다.
한편, 근세 조선독립 기미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 큰스님이 한일합방 경술치욕을 당했을 때 하동 지 리산 칠불선원 조실로 있다가
1911년도부터 1919년 3ㆍ1 독립운동 당시까지 만해 한용운 대사를 앞세워 천도교 손병희 교주, 기독교 장로회 길선주 목사, 기독교 감리회 이필주 목사 등과 교류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도가 합심하여 민족중흥과 종교중흥을 발원한 성지 이다.
이 우면산 대성사는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1954년도에 중건한 자그마한 암자인데, 1997년부터 총 임야 면적 52,800㎡ 위에 대웅보전과 요사채 등의 복원 불사가 시작되고 있다.
서초고등학교 남쪽 삼성주택 단지의 아래쪽에 나홍좌의 묘가 있었으 며, 이를 나 대상의 묘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주택이 들어서면서 묘 가 이장되고 동신아파트 서쪽에 서 있던 묘비는 매몰되었다.
나홍좌 의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제백(濟伯)으로 원래 문인이었으니 평소 그는 식견과 도량이 넓고, 인품이 온화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한편 나홍좌는 현재의 중고 남산동 남산초등학교 근처 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이 부근을 나대장촌이라 불렀으며, 옛지명으로 나동이라는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서초동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는 조선 태종때 대제학을 지낸 정역 이 처음 자리잡고, 이후 해주 정씨가 모여사는 집성촌이 되어 정곡 (鄭谷)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정역은 효령대군의 장인이었으며,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조선개국시에는 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가 한성부윤, 형조판서, 호조판서, 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성품이 근검하고 덕망이 높아 왕실과 인척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아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의 묘는 이곳에 있다가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고, 현재는 정역의 신도비만 서초동 1701번지 서초로변 법원단지 입구에 세워져 있다
서초동에는 예부터 많은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서초동은 명달리와 서 초리가 합치면서 이루어 졌다.
명달리는 후에 명덕리(明德里)로 칭하기도 했으며 상명달리, 하명달리, 산밑, 궁너머라는 4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서초역과 서울고등학교 사이의 야트막한 야산 아래 지은지 2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기와집이 있었다(서초동 1497-19). 이 곳은 옛날에 하명달리로 불리었던 마을이었고, 이 집은 조선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목사(牧使)를 지낸 분의 사당이다. 특기할 만한 일 은 이 집에 조선 후기 김조순이 쓴 "명덕신지(明德新址)"라는 목간 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명덕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김조순은 정조9년(17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순조의 장인으로 순조를 30년간 보좌 하였다. 그러나 후에 소실인 나합(羅閤)에 빠져 국사를 제쳐두는 폐단이 있었으며, 그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현재 김조순이 쓴 이 목간판과 가옥은 보존되고 있지 않다.
지하철 양재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떨어진 우면산 끝자락 서초 동 산23-1번지에는 여러기의 묘가 있는데, 이중 하나가 조선 개국 공신 삼봉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고 있다.
풍수지리학상으로 학이 날개를 펴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는 명당으로 묘소는 학의 머리 부분에 있다. 이곳이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는 이유는 각종 문헌자료와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온 이야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지] 과천현편에는 "정도전묘재현동십팔리(鄭道傳墓 在縣東十八里)", "양재역 재 동십오리(良才驛 在東十五里)"라는 구절이 있고, <봉화정씨족보> 에도 "정도전묘광주사리현(鄭道傳墓廣州四理縣)"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마을 사람들로부터 대대로 전해 오는 구전에의하면 정도전의 묘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1989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제1호분은 우선 신분이나 계급이 높은 지배계층의 분묘형태를 띠고 있으며, 두꺼운 회벽과 그곳에 서 나온 유물이 조선초기의 백자라는 것이었다.또한 목관에 안치되어 있는 피장자의 유해는 머리 부분만 남아 있고 다른 부위는 발견 되지 않았다. 이것은 [태조실록]14권에 "정삼봉이 참형되었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 피장자가 정도전일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유학의 대가인 정도전(1337년~1398년)은 1392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1등 개국공신으로 군사, 외교, 성리학, 행정, 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하였다. 태조9년(1398년)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었다.
분토골은 서울교대 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마을 인근에서 고운 흙이 나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곳은 일명 부곡(富谷)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전에 이 마을이 부유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