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배나무골과 물골(갯말)의 개천이 합쳐지는 곳으로, 잠원나루 주변의 반포리(현재 반포1, 3동), 사평리(현재 잠원동) 주민들이 이수(梨水)를 건너 삼남대로(지금의 동작대로)로 왕래할 때 건너던 간이나루터였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때 갯말 주민들이 현재의 방배동 입구로 이주하여 새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새말"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수나루에는 배물다리(梨水橋)가 있었으나 1970년 이수지구 택지개발 때 철거하고 이수교(폭 30m, 연장 60m)를 건설하였다. 인근에 있는 서초구민체육센터는 1994년에 개관(開館)한 것으로 지하 2층, 지상 3층(연면적 7,315㎡)에 수영, 탁구, 헬스, 농구, 에어로빅 등 20여 종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이수나루터 안내표석
이수교전경
반포천산책길
서초구민 체육센터
수원, 과천 등에서 남태령(南泰嶺)을 넘어 삼남대로(현재의 동작대로)를 따라 도성(都城)으로 왕래하던 사람들이 한강을 건널 때 이용하던 나루터로 예전에는 이수천(利水川) 입구에 있어서 수심이 깊었다고 한다. 이 나루는 호남, 호서지방의 과객과 사대부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지만 당시에는 사선(私船) 몇척만 있어서 불편했으나 영조때(1728년) 이인좌의 난(1728년 3월 15일)을 계기로 나루관리를 전담하는 별장(別將)이 파견되었고, 노랑진에서 나룻배 3척을 이관하여 나루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철종때 주교(舟橋)를 만들어 내곡동에 있는 선왕(순조)인 인릉에 참배하러 갈 때 건너다님으로써 더욱 번성했으나 1917년 한강인도교, 1984년 동작대교(폭 40m, 연장 1,330m) 가설로 나루터의 역할이 쇠퇴하였다. 현재 동작역은 1985년 12월 18일 준공된 지하철 4호선역으로 연 수송인원이 170만 명이나 되고, 인근에 있는 한강홍수통제소는 1975년 1월 23일 준공된 국가시설로 장마철 한강 홍수조절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동작역에서 본 반포천 하구
동재기나루터에서 본 동작대교
한강홍수통제소 전경
한강에 제방(堤防)을 쌓기전 이 일대는 서래마을 뒤 청룡산에서 한강 모래사장으로 작은 개울들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서릿개(蟠浦)"라고하였으나 음이 변해서 지금의 반포(盤浦)로 부르게 되었다. 1972년 이수택지개발 계획에 의거 한강에 제방(堤防)을 쌓았으며, 1973년 대한주택공사가 이곳에 대단위 아파트를 건립하면서부터 현재 반포동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한강둔치 반포지구에 있는 반포서래섬은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올림픽대로 건설 및 한강 종합개발시 조성한 인공섬으로 3개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으며 물길을 따라 수양버들이 잘 드리워져 있고 철새도래지, 화훼단지, 수상스키장 등이 조성된 시민휴식공간이다.
반포서래섬 안내표석
반포서래섬다리
한강둔치 반포지구
반포지구 꽃동산
반포서래섬 수양버들
잠원(蠶院)이란 잠실리의 "蠶"자와 신원리의 "院"자를 따서 붙여진 것으로 지금의 잠원변전소와 신반포 16차㉵ 119동 사이길을 따라 한강에 이르는 곳을 말하며, 여기서 나룻배로 한강 북쪽에 있는 용산구 점말과 서빙고로 갈 수 있으므로 일명 "점말나루" 또는 "서빙고나루"라고도 하였다. 특히 한남대교 북단에 있는 한강진(漢江鎭)은 신라시대부터 한강을 건너는 교통요충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제1의 도선장(渡船場)으로 송파, 노량진과 더불어 경강3진의 하나였다. 잠원나루는 국왕들이 헌인릉, 선정릉 행차시 도강(渡江)하였고, 도성(都城) 사람들의 봉은사 왕래시 많이 이용하였으며, 연산군 때에는 청계산 수렵(狩獵)을 즐기기 위해 부교(浮橋)가 가설(架設)되기도 하였다. 한편 1969년에 건설된 한남대교(폭 27m, 연장 915m)가 경부고속도로에 이어진 것은 옛날 한강진에서 이곳을 지나 말죽거리, 원지동을 거쳐 삼남지방(충청, 영남, 호남)으로 이어지는 옛길의 재현(再現)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강둔치 잠원지구에는 각종 운동장, 자연학습장, 야외수영장, 보트장 등이 잘 조성되어 있다.
잠원나루터 안내표석
한강둔치 잠원지구 진입로
잠원나루터에서 본 한남대교
한강둔치 잠원지구 꽃밭
한강둔치 잠원지구 수영장
조선 초기에 심어진 이 뽕나무는 가슴높이 둘레 1.4m로 1973년 1월 26일 서울특별시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1973년 1월 26일)되었다. 당초 원줄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서 자랐으나 지금은 가지 중간부분이 잘린 고사목(枯死木)으로, 이 나무가 잠실리 뽕나무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 이 일대가 뽕나무 밭으로 여기에 신잠실이 설치되었기 때문인데 잠실은 견사(絹絲)를 만들기 위해 잠종(蠶種)을 받아서 뽕잎을 먹이고 누에를 치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 잠실을 설치한 시기는 용재총화(?齋叢話) 기록에 의하면 성종과 연산군 재위(在位)때로 추정되며, 잠실을 관장하는 잠실도회(蠶室都會)는 당초 중국의 예에 따라 궁중(宮中)에 잠실을 설치하여 중전과 세자빈이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치는 일의 공들임을 익힘으로써 백성(百姓)들에게 길쌈시범을 보이고자 한 것으로 이곳은 뽕나무 묘목재배, 잠종보급 및 잠업강습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대한잠사회에서 주변에 뽕나무 3주를 심어 함께 관리하고 있다.
잠실리뽕나무 안내표석
잠실리 뽕나무
잠실리 뽕나무 대체목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시 잠실리(현재의 잠원동) 주민들이 수해(水害)로 집을 잃자 흥동소학교를 세운 부호(富豪) 김주용(金周容)선생이 이곳에 가옥(家屋) 20채를 지어 마을을 이룬 곳으로 당시에는 전나무골로 불렀으나 김주용(金周容)의 "周"자와 흥동소학교(興東小學校)의 "興"자를 따서 "주흥동(周興洞)"이라고 하였다. 또한 "고 김주용선생 기념비(故 金周容先生 記念碑)"라고 쓰여진 공덕비(功德碑)가 있어서 "비석거리" 라고도 하였는데, 이 비석(碑石)은 현재 잠원동 신반포 27차아파트 단지내 351동 북쪽에 있다.
주흥동 안내표석
주흥공원 전경
주흥교 전경
김주용선생 기념비
1조선말 순조11년 무렵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사회가 크게 문란해지자 도둑들이 창궐(猖獗)하여 민가(民家)를 수탈(收奪)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의협심이 강한 아홉 명의 무명(無名) 선비가 주동이 되어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도둑을 물리치고 민가를 보호하였는데, 이곳 마을주민들이 그 공적(功績)을 기리기 위해 아홉 개의 비석(碑石)을 세워 그 넋을 후세(後世)에 전함으로써 오늘날 풍요로운 반포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비석은 일제말기(日帝末期)에 없어졌다고 하며 현재 이곳에는 언구비공원(1,032㎡)이 있다.
언구비 안내표석
언구비공원 조경시설
언구비공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