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정보


헌릉/인릉

유적이야기

사적(史蹟) 제194호(1970년 5월 26일 지정)인 이곳은 동쪽의 헌릉(獻陵)과 서쪽의 인릉(仁陵)으로 구성되어 있다. 헌릉(獻陵)은 세종2년(1420년)에 조성된 조선 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봉릉(雙封陵)으로 왼쪽이 태종 능(陵)이며, 봉분 하부에는 병풍석(屛風石)을 만들어 각 방위별 12지신상을 조각하였고 둘레에는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등 많은 비석들이 있다. 태종(太宗)은 태조(太祖)의 5남으로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왕자의난을 일으켜 1400년에 즉위하여 18년간 재위하는 동안 사병(私兵)을 폐지하고 의정부 설치 등 관제개혁과 관아건설, 신문고설치, 호패법실시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인릉(仁陵)은 조선 제23대 순조(純祖)와 순원왕후 김씨의 동원합봉(同原合封) 형식의 능(陵)으로 일반 단릉처럼 혼유석 1좌만 있는 2실로 합장하였고 명등석은 영릉을 모방했다. 순조(純祖)는 정조(正祖)의 2남으로 수빈박씨 소생이며 11세인 1800년에 즉위하여 34년간 재위하는 동안 외척들의 세도정치와 신유박해, 을해박해 등 천주교 탄압, 수재와 전염병, 홍경래의 난(1811년) 등으로 민심이 불안했다.

주소명 : 헌인릉길 36-10(내곡동) 헌ㆍ인릉 입구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헌릉 인릉 입구전경

    헌릉 인릉 입구전경

  • 헌릉 전경

    헌릉 전경

  • 인릉 전경

    인릉 전경

말죽거리

유적이야기

말죽거리에 대한 지명유래는 제주에서 보내온 말을 이곳에서 최종 손질하고 말죽을 먹인 곳이라는 설과,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자들에게 마편(馬鞭)과 숙식(宿食)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었고 이곳에서 여장(旅裝)을 풀고 말에게 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 이괄(李适)의 난 때 피난을 가던 인조임금이 이곳에서 유생(儒生) 김이(金怡)등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들었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 병자호란때 인조임금이 청나라의 침입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하자 청군은 산성을 포위한 후 이곳을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로 삼고 청군의 기마병들이 교대로 이곳에서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끓여 먹였다는 설 등이 있다. 이러한 양재역은 조선시대 역원(驛院)제도에 따라 30리마다 대로변에 설치되었던 주요역으로 중앙과 지방의 공문전달, 관물, 세공수송, 관리사행의 마편급여와 숙식제공, 변경군정의 보고와 민정시찰, 비행관리의 규찰 등을 담당하였으며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 사상(私商)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다.

주소명 :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610 (양재동) (서초종합사회복지관 앞)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양재역사거리

    양재역사거리

  • 말죽거리길 입구

    말죽거리길 입구

  • 남부순환도로

    남부순환도로

양재동산말

유적이야기

예전에는 마을이 없었으나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 게리마을 주민들이 동산(東山)으로 이전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한편 양재천(良才川)은 청계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맑은 물이 서초구와 강남구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유량(流量)이 많아 이곳에 흥진나루가 있었으며, "양재(良才)"라는 말은 어질고 재주있는 선비가 많이 산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이 일대에는 잘 정돈된 양재근린공원(36,523㎡)이 있어서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소명 : 언남길 8(양재동) 양재근린공원 내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양재근린공원 전경

    양재근린공원 전경

  • 양재천 전경

    양재천 전경

  • 양재천 자전거도로

    양재천 자전거도로

원지동석불입상 및 석탑

유적이야기

원지동에서 청계산 등산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굴다리 입구 오른편에 13㎡ 규모의 미륵당(彌勒堂)과 3층 석탑이 있으며, 미륵당 안에는 높이 2m정도의 백색입상(白色立像)인 미륵불이 있고 장구, 목탁, 제기(祭器) 등이 갖추어져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3호(1993년 4월 3일 지정)인 이 미륵불(彌勒佛)은 원터마을을 지키는 수호신(守護神)으로 1년에 한번씩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낸다고 한다. 원래 이 미륵불은 아주 신비한 영험(靈驗)이 있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일본인들이 마차를 동원하여 미륵불을 반출하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런 미륵불의 영험을 믿고 계속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본인들은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냈는데, 그 후부터 미륵불은 영험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전한다.

주소명 : 원지동 362-4,5 번지 (미륵당 옆 남쪽)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원지동 미륵당 전경

    원지동 미륵당 전경

  • 미륵불 상반신

    미륵불 상반신

  • 원지동 미륵당 3층 석탑

    원지동 미륵당 3층 석탑

원지동원터

유적이야기

청계산 제1야영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원터"인데 한자로 "院基"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공무(公務)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먹고 잘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교통요충지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에도 잠원나루에서 말죽거리를 거쳐 판교 이남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큰 원(院)이 있었다. 근세에 들어와서 원은 없어지고 석축(石築)만 있었으나, 경부고속도로 공사와 취락구조 개선사업 등으로 석축도 없어지고 지금은 현대식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한편 원터에는 2002년 10월 12일 현재 약 255년으로 추정되는 갈참나무(높이 21m, 가슴높이 둘레 2.84m)와 굴참나무(높이 27m, 가슴높이 둘레 3.8m)가 있으며 이 나무들은 1972년 10월 12일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지정(서22-8, 서22-9)되어 주말 청계산을 찾는 많은 시민들의 휴식처와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주소명 : 서울 서초구 원터6길 3 (원지동) (원터마을 쉼터앞)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청계산입구 등산로

    청계산입구 등산로

  • 원지동 원터 쉼터

    원지동 원터 쉼터

  • 원지동 원터 잠나무 보호수

    원지동 원터 잠나무 보호수

원지동고인돌유적지

유적이야기

1986년 「한강유역 서울 원지동 지석묘조사연구, 이형구」자료에 의하면 1984년 원지동 경부고속도로변에서 선돌(立石)과 고인돌(支石)군(群) 4개소가 발견되었으며, 원터마을 미륵당 야산에도 선사시대(先史時代) 지석묘와 석기유물 및 일정간격으로 열을 지어 있는 많은 괴석(塊石)들이 발견되었고, 북쪽 150m 지점 밭 가운데서도 7기(基)의 지석묘(支石墓) 군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원지동 미륵당에서 남쪽으로 약 100m, 고속도로 동쪽 20m지점에서 선돌 1기가 발견되었으며, 인근에 지석묘로 보이는 돌무리가 계속 확인되었다고한다. 한강유역의 고인돌은 북방식(北方式) 지석묘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원지동고인돌은 남방식(南方式) 형태의 지석묘로 추정되어 학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주소명 : 원지동 336-2번지 (경부고속도로변)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원지동 고인돌 B지구(1-3)

    원지동 고인돌 B지구(1-3)

  • 원지동 고인돌 B지구(1-1)

    원지동 고인돌 B지구(1-1)

  • 원지동 고인돌 B지구(1-2)

    원지동 고인돌 B지구(1-2)

  • 원지동 고인돌 E지구(1-1)

    원지동 고인돌 E지구(1-1)

충현정묘

유적이야기

고려 공민왕때 언관(言官)을 지낸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1341년∼1371년) 선생은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는데 당시 신돈(辛旽)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국정을 그르치고 왕과 용상에 나란히 앉아 있는 등 신돈(辛旽)의 무례함을 정면으로 힐책하자 신돈이 황급히 아래로 내려앉은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선생은 좌천(左遷)되어 귀양가게 되었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31세에 별세하자 공민왕은 그의 충성심을 깨닫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증(追贈)하였다. 현재 우면동 암산마을 뒤편에 있는 이 사당(祠堂)에는 조선초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석탄선생의 아들인 이래(李來) 경절공(景節公)도 함께 모시고 있다.

주소명 : 우면동 49번지 (충현정묘 정문옆)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신도비

    신도비

  • 충현정묘 외부

    충현정묘 외부

  • 충현정묘 내부

    충현정묘 내부

월산대군이정태실

유적이야기

우면동 형촌마을 옆에 있는 나지막한 봉우리를 태봉(胎峰)이라고 하는데, 이는 조선조 제7대 세조의 큰손자이며,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태(胎)를 묻었기 때문이다. 당초 이곳에는 커다란 돌항아리에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를 넣어 두었으나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도굴해 가고 현재는 돌항아리(石函)와 "月山君정胎室" (월산군정태실)이라고 쓰여진 태비(胎碑)만 남아 있다. 과거 일본의 한 미술관련 잡지에는 이와 관련하여 "이 항아리는 2개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에서 가지고 왔다" 라고 게재되어 있어 당시 지명과 일치하는 등 태봉의 유래와 백자의 존재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월산대군(1454년∼1488년)은 호가 풍월정(風月亭)으로 책과 자연을 가까이하여 풍류를 즐겼으며 현재 "풍월정집" 20권이 전한다.

주소명 : 우면동 291번지 (형촌마을 태봉 정상)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석함 및 태비

    석함 및 태비

  • 태봉 전경

    태봉 전경

  • 태봉 원경

    태봉 원경

성정승묘소

유적이야기

옛날 과천 이남에서 도성으로 왕래할 때 삼남대로(三南大路)를 따라 남태령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지만, 남태령 고개가 험준하고 도둑들이 많아 일반과객들은 주로 고개를 넘지 않고 우면동쪽으로 우회하여 말죽거리로 통행하였는데 이곳의 형촌마을에는 호랑이 같이 엄한 성정승(성석연)이 있어서 동네어귀에서부터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지나다녔다고 한다. 성석연(成石연, 1357년∼1414년)은 호가 상곡(桑谷)이며 조선 초의 문신(文臣)으로 예조ㆍ호조ㆍ형조판서와 수문전ㆍ홍문관 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성품이 단아하고 준수하였으며 일에 임할 때는 공사를 분명히 가려 정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는 공의 행적을 기린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주소명 : 우면동 산65번지 (형촌마을 뒤 묘소입구)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성정승 묘소

    성정승 묘소

  • 성정승 묘소봉 전경

    성정승 묘소봉 전경

  • 성정승 신도비

    성정승 신도비

형촌회화나무

유적이야기

형촌(荊村) 마을 중앙 도로상에 2002년 12월 20일 현재 약 222년으로 추정 되는 회화나무가 있으며, 나무 밑에는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동자상(童子象) 미륵(彌勒)이 나무를 향하여 서 있다. 이 나무는 높이가 12m이고, 가슴높이 둘레 2.8m로 2000년 12월 20일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지정(서22-28) 관리되고 있다. 한편 이 나무 인근 주택(우면동 218-1)에는 2002년 10월 12일 현재 약 255년으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배나무(높이 18m, 가슴높이 둘레 1.7m)가 있으며 이 나무는 1972년 10월 12일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지정(서22-10) 관리되고 있다.

주소명 : 우면동 218-14번지 (형촌마을 내)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회화나무 전경

    회화나무 전경

  • 회화나무 및 동자상

    회화나무 및 동자상

  • 돌배나무

    돌배나무

식유촌회화나무

유적이야기

형촌마을 옆 동네인 식유촌(植柳村)에 2002년 10월 12일 현재 약 355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가 있으며 1945년 이 나무에서 구렁이 4마리가 나와서 동서남북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았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현재 이 나무는 높이 19m이고, 가슴높이 둘레 3.6m로 1972년 10월 12일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지정(서22-5) 관리되고 있다.

주소명 : 우면동 595번지 (식유촌마을 내)

둘러보기
  • 안내표석

    안내표석

  • 석유촌 회화나무 구멍

    석유촌 회화나무 구멍

  • 회화나무 전경

    회화나무 전경


  • 자료관리부서 문화예술과
  • 담당전화 02-2155-6220
  • 위치 구청본관 4층
  • 최종수정일 2017-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