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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및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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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동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하여 지은 동명으로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의 양재동이라 칭해오던 것을 일제때 경기도 구역확정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양재리로 정하고 광복 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양재동이라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예전에 교통의 요지로 말죽거리로 애칭되었으며,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으로, 양재천 연안의 농경지가 있어 벼농사가 행해졌던 중심지였는데,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택지로 조성되었다.

  • 양재동

    예부터 말죽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양재역, 양재원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에는 사상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주요 상업지역이었다.

  • 말죽거리

    말죽거리는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을 말하는데, 이곳 주민들에 의하면 말죽거리라고 불리게 된 내역은 3가지 설로 전한다고 한다. 조선초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편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었고 근처에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즉 먼길을 걸어 입경하려는 여행자들 또는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고, 자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다해서 이곳을 말죽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또다른 설로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유생 금이 등이 쑤어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드시고 갔기 때문에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다른 설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군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청군은 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이 때 이곳은 청군 장사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에서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마죽을 쑤어 먹였다하여 말죽거리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말죽거리에 있었던 양재역은 조선시대에 시행된 역원제도에 따라 설치 된 주요역이었다. 양재역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관료 여행의 마필 급여와 숙식의 제공, 변경 군정의 보고 및 민정시찰, 비행관사의 규찰 등을 담당했다. 역은 30마리마다 대로변에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양재역도 대로변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또한 조선초 명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왕의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함으로써 국권을 좌우하게 되었을 때, 이를 비방한 글이 당시 양재역 벽에 붉은 글씨로 씌여졌다. 이로 인해 일어났던 정미사화는 일명 [양재역 벽서의 옥]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말죽거리는 양재전철역과 고속도로 양재인터체인지, 만남의 광장이 연계되어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 양재역

    말죽거리에 있었던 양재역은 조선시대에 시행된 역원제도(驛阮制度) 에 따라 설치된 주요 역이었다. 양재역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관료사행의 마필 급여와 숙식의 제공, 변방 군정의 보고 및 민정시찰, 비행관리의 규찰 등을 담당했다. 역은 30리마다 대로변에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양재역도 대로변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오늘날에도 이곳에 지하철 양재역이 설치되어 지역 교통 편리에 큰 몫을 하고 있는 것도 전날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또 이 양재역은 정미사화(丁未士禍)와 관련이 있다. 조선초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왕의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국권을 좌우하게 되었다. 명종 2년(1547) 9월 부제학 정언각이 어느날 그의 딸을 전라도에 전송하기 위해 양재역까지 갔다. 그런데 벽을 보니 붉은 글씨로 "위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등이 권력을 농락하여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그대로 서서 기다리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때 이기·정순붕 등이 "이것은 지난번 을사사화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봉성군(鳳城君) 등을 처형하고 송인수·이언적 등 20여명을 유배시켰다. 이로써 사람들이 다시 화를 입어 이를 정미사화라고 하고, 일명 "양재역 벽서의 옥(獄)"이라고도 부른다.

  • 거여마을

    현재 양재2동사무소가 위치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원래는 이곳 지형이 게모양을 닮았다하여 게리라고 불리다가 거여, 거여리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1958년 북방식 지석묘 6기가 발견됐으나 도시계획에 밀려 지금은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지석묘의 원래 위치는 양재천 남방 100m지점이라 한다. 또한 이곳에는 융수군수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